grey ladder

멘토이신 Ralph Basui Watkins 박사님이 가르치시던 수업에 앉아있던 걸 생생히 기억합니다. 박사님은 성경해석과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박사님은 한 사람의 경험과 세상과 살아가는 방식, 즉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렌즈’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셨습니다. 신학을 처음 접한 저에게는 처음 듣는 용어와 개념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렌즈 개념은 너무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저는 다양한 색깔의 선글라스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글라스를 쓴 제 모습이 멋있었지만, 온 세상이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도 기억합니다. 파란색 선글라스는 모든 것을 파란색으로 바꾸었습니다. 녹색 선글라스도 모든 것에 녹색으로 입혔습니다. 이 색깔들은 이 비유의 핵심이지만, 대부분의 선글라스들이 주는 그늘과 왜곡을 설명하기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교실에서 이 깨달음을 얻은 저에게 스스로 심오한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어떠한 렌즈를 사용하고 있는지 또한 저 스스로의 세계관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관으로 인해 성경 내러티브가 얼마나 그늘로 가려져 있는지 알아야 할것 같습니다.

몇 년 후, 저는 개인과 그룹이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렌즈들 (해석학적 접근)이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간결성을 위해 좀 대범하게 일반화를 시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살아가는데 정의와 샬롬이 핵심 개념이 아닌 그룹에서는 특정한 렌즈가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 렌즈는 본문의 숨겨진 의미, 혹은 “더 중요한” 의미를 찾으려는 희망으로 실제 성경을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짧은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식의 성경 읽기는 본문을 그늘로 가리거나, 변색시키거나, 혹은 왜곡 시켜버립니다. 이러한 렌즈들은 이미 알고 있는 영적 및 보편적 진리에 초점이 맞춰져, 성경 본문의 사회 지리와 인물들의 경험은 흐릿해집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알레고리적 접근은 한 구절의 분명한 특성을 가려버리며, 본문의 사람과 하나님의의 상호작용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Bernard Ramm은 여러 알레고리적 학파와 방법을 간략히 설명합니다. 알레고리적 학파의 핵심은 실제 의미가 본문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본문자체는 대부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에서 간략하게 주장하는 바는 본문의 숨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렌즈는 종종 정의와 샬롬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읽고 살아내기 위해선 정의의 렌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튀는 색깔의 렌즈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관한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주님에 의해 중단된 장례 행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눅 7:11-15). 죽은 청년은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을 일으키시니 모인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소문이 온 지역으로 퍼집니다.

종종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본문의 주인공이 됨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축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우리의 렌즈는(적어도 서구 교회에서는) 대부분 알레고리적으로 접근합니다. 우리는 본문뒤의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서 본문 자체를 놓쳐버립니다. 이글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것은 최소한 우리가 이미 쓰고있는 렌즈가 최소한 무엇인지 알거나 벗어서 본문을 놓치거나 희생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자가 살아나는 기적 본문이, 현재 우리 환경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습니까? 그 본문에서 저희가 놓쳐서는 안되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주요 인물과 그룹이 드러납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큰 군중들, 장례 행렬을 따라온 도시의 많은 군중들, 죽은 아들, 그리고 과부 어머니가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과부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외아들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애통해 하는 어머니이자 과부입니다. 우리가 이 여성을 보는 보편적인 렌즈는 그녀의 아들을 잃은 깊은 상실감에서 오는 고통과 괴로움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렌즈는 본문과 우리 삶의 사회 문화적 현실을 간과하게끔 하는 알레고리적 경향과 기독교 전통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의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더 렌즈가 무슨 일을하는지 보세요. 만약 모든 독자가 과부의 감정적 괴로움을 보았다면,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과부의 감정에 국한됩니다. 과부의 삶이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 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기적은 어머니의 애통에만 집중되어, 아들을 살리신 일이 어머니의 고통을 없애 버린게 됩니다. 이 해석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영을 위로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삶과 사회 현실에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러한 튀는 해석들은 제 튀는 선글라스처럼 본문을 변색시키고, 가리워 버립니다. 이런 튀는 렌즈들은 알레고리적 해석에 물들어 있던 그리스-로마 전통 해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해석학은 일반적으로 본문 뒤의 깊은 의미에 중점을 두다 보니, ‘표면적;이거나 덜 중요한 부분들을 희생시켜버립니다. 파란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아름다운 노란색과 짙은 갈색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이런 튀는 렌즈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원하는 여러가지 아름다움을 빼앗아 버립니다.

정의의 렌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네, 성경을 깊이 연구할때 종종 얻게 되는 놀랍고 계시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면, 실제 단어와 본문에서도 놀랍고 계시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Stephanie Buckhanon Crowder는 누가복음의 이 본문에서 과부가 “기초적 생계 수단, 곧 모든 경제적 안전을 상실했음”을 강조합니다. 아들이 없는 과부는 그녀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볼때 가장 사회 취약 계층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매일의 돌봄, 보호, 법적 필요들, 공동체적 참여 등을 위해 다른 사람의 자비에 의존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복합적 괴로움과 박탈 속에 있던 과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좀더 정의에 맞춰진 렌즈는 독자인 우리들에게 과부의 감정적 상실만 보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과부의 전인적 상태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매의 가족을 잃어 상심한 날들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힘들어할 날들도 알고 계십니다. 이 여인의 느끼고, 알고, 경험하고,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모든 것에 메시아의 긍휼이 있습니다. 이 긍휼은 과부가 살았던 현실을 빼먹지 않으며, 현재의 눈물에만 집중하지도 않습니다.

이 본문에서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우리 모두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한 부분만 아니라, 모든 것에 관심을 두십니다. 이같은 관점은 본문의 특정한 과부에게만 주어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의 복음 이해와 선언을 보여줍니다. Justo González는 이 본문이
“누가복음 전체의 주제를 잡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구절 즉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실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Drew Hart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혁명적인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정의의 렌즈를 사용하면 주제나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제 현실의 실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알레고리적 본문 읽기는 실제적 정의를 부정하고, 종말론적 정의에 대한 성화만 강조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자주 우리는 “가난한”, “사로 잡힌”, “눈먼”이란 문법적 형용사들을 단순한 은유로만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실체가 없는 은유적 모습들을 물리치도록 기도만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것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육체와 영혼으로 보셨습니다”

정의란 여기서 혁명을 위해 정치적 변동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윤리”이며 “성경적 믿음의 가장 기초”인 정의와 해방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을 인간의 실제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주는 자유와 해방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이를 선언하시고 누가복음 7장에서 잘 보여줍니다. 이 과부의 온전함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과부의 삶에 개입하시도록 한것입니다. 본문의 언어를 잘 들으세요. 예수님은 과부의 애통, 과부의 삶, 그녀가 직면한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울지 말라”(눅 7:13)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눅 7:15)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아들을 돌려 줌으로써 그녀의 아픔과 상실을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에서, 과부의 사회적 경제적 미래도 근본적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무언가 기대하는 군중들 속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이야기 중에서 고통과 어려움에만 집중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경험을 중심으로 과부의 현재 상황과 예수님이 가지고 온 새 생명은 두 무리 모두에게 – 기적과 생명의 희망을 보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생명의 희망을 잃어버린 과부를 따르던 무리-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정의 지향적인 렌즈는 독자들로 하여금 본문의 다양한 색깔과 뉘앙스를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의 아픔도 존재하지만, 그녀의 트라우마, 불안, 불확실, 사회적 경제적 상황, 가문의 미래, 취약성, 두려움 그리고 분노까지 존재합니다. 그 과부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샬롬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바램이 들어있지 않거나, 형성되지 않거나, 닿지 않은 렌즈는 성경 속의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자세히 보지 않게 하며, 실제 적용의 깊이와 다양성이 부족한 본문 해석으로 이끌어 갑니다.

결론
종종 기독교 내 정의에 대한 대화는 사회적 행동, 정치적 의제, 또는 교단적으로 나뉘어진 복음 정의가 대부분입니다. 이 글은 그런 주장들에 관여하기 보다는, 어떻게 성경을 보는냐는 방식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계시로 하나님-인간 상호작용 전체를 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너머의 뜻을 파헤치려고 하는 튀는 렌즈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의 현실을 다방면으로 보시고 긍휼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하심으로 예수님은 과부의 삶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Yolanda Pierce는 그녀의 최근 저서인 내 할머니의 집에서(In My Grandmother’s House)를 통해 빗속을 운전하는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녀는 길가에 서있는 백인 여성을 보고 도와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 갈등은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갈등은 그분이 도움을 받을 것인지 말것인지 였습니다. 그녀는 개입에 대한 그녀의 고찰을 통해 구원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에 다시 질문하면서 이 챕터를 끝맺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안전할때, 다른 공동체들, 민족들, 그리고 문화들도 안전해지고 온전해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열어 성경과 이웃을 볼 수 있을까요? 정의는 우리의 설교보다, 우리가 쓰는 책 보다, 우리가 가르치는 수업 보다 더 큽니다. 이런 것들이 정의에 속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많은 설교가들과 학자들이 자신들의 사역 핵심에서 정의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목표가 설교나, 책이나, 수업은 아닙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하나님이 애통해 하시는 것은 실제 살아 있는 현실의 중단 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볼 수 있다면, 우리 또한 긍휼을 가지고 말하고, 치유하고, 되돌려 줄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Written By

드와이트 래드클리프(Dwight A. Radcliff Jr.)는 윌리엄 E. 패넬 흑인교회연구센터(William E. Pannell Center for Black Church Studies)의 학장이자 선교, 신학, 문화학 조교수입니다. 그는 교육과 설교를 위해 미국 전역과 해외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고, 도시 교회 개척, 문화, 신학, 설교, 사회 정의, 밀레니얼 세대, 복음주의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신학교, 대학교, 학회에서 강의해 오고 있습니다. 그는 20년 이상의 목회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주 가디나(Gardena)에 위치한 다문화, 다세대, 도시 교회인 메시지 센터(The Message Center)의 목사로, 아내 디션 존스-래드클리프(DeShun Jones-Radcliff)와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와 아내에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멘토이신 Ralph Basui Watkins 박사님이 가르치시던 수업에 앉아있던 걸 생생히 기억합니다. 박사님은 성경해석과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박사님은 한 사람의 경험과 세상과 살아가는 방식, 즉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렌즈’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셨습니다. 신학을 처음 접한 저에게는 처음 듣는 용어와 개념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렌즈 개념은 너무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저는 다양한 색깔의 선글라스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글라스를 쓴 제 모습이 멋있었지만, 온 세상이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도 기억합니다. 파란색 선글라스는 모든 것을 파란색으로 바꾸었습니다. 녹색 선글라스도 모든 것에 녹색으로 입혔습니다. 이 색깔들은 이 비유의 핵심이지만, 대부분의 선글라스들이 주는 그늘과 왜곡을 설명하기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교실에서 이 깨달음을 얻은 저에게 스스로 심오한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어떠한 렌즈를 사용하고 있는지 또한 저 스스로의 세계관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관으로 인해 성경 내러티브가 얼마나 그늘로 가려져 있는지 알아야 할것 같습니다.

몇 년 후, 저는 개인과 그룹이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렌즈들 (해석학적 접근)이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간결성을 위해 좀 대범하게 일반화를 시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살아가는데 정의와 샬롬이 핵심 개념이 아닌 그룹에서는 특정한 렌즈가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 렌즈는 본문의 숨겨진 의미, 혹은 “더 중요한” 의미를 찾으려는 희망으로 실제 성경을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짧은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식의 성경 읽기는 본문을 그늘로 가리거나, 변색시키거나, 혹은 왜곡 시켜버립니다. 이러한 렌즈들은 이미 알고 있는 영적 및 보편적 진리에 초점이 맞춰져, 성경 본문의 사회 지리와 인물들의 경험은 흐릿해집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알레고리적 접근은 한 구절의 분명한 특성을 가려버리며, 본문의 사람과 하나님의의 상호작용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Bernard Ramm은 여러 알레고리적 학파와 방법을 간략히 설명합니다. 알레고리적 학파의 핵심은 실제 의미가 본문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본문자체는 대부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에서 간략하게 주장하는 바는 본문의 숨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렌즈는 종종 정의와 샬롬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읽고 살아내기 위해선 정의의 렌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튀는 색깔의 렌즈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관한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주님에 의해 중단된 장례 행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눅 7:11-15). 죽은 청년은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을 일으키시니 모인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소문이 온 지역으로 퍼집니다.

종종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본문의 주인공이 됨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축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우리의 렌즈는(적어도 서구 교회에서는) 대부분 알레고리적으로 접근합니다. 우리는 본문뒤의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서 본문 자체를 놓쳐버립니다. 이글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것은 최소한 우리가 이미 쓰고있는 렌즈가 최소한 무엇인지 알거나 벗어서 본문을 놓치거나 희생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자가 살아나는 기적 본문이, 현재 우리 환경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습니까? 그 본문에서 저희가 놓쳐서는 안되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주요 인물과 그룹이 드러납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큰 군중들, 장례 행렬을 따라온 도시의 많은 군중들, 죽은 아들, 그리고 과부 어머니가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과부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외아들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애통해 하는 어머니이자 과부입니다. 우리가 이 여성을 보는 보편적인 렌즈는 그녀의 아들을 잃은 깊은 상실감에서 오는 고통과 괴로움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렌즈는 본문과 우리 삶의 사회 문화적 현실을 간과하게끔 하는 알레고리적 경향과 기독교 전통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의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더 렌즈가 무슨 일을하는지 보세요. 만약 모든 독자가 과부의 감정적 괴로움을 보았다면,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과부의 감정에 국한됩니다. 과부의 삶이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 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기적은 어머니의 애통에만 집중되어, 아들을 살리신 일이 어머니의 고통을 없애 버린게 됩니다. 이 해석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영을 위로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삶과 사회 현실에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러한 튀는 해석들은 제 튀는 선글라스처럼 본문을 변색시키고, 가리워 버립니다. 이런 튀는 렌즈들은 알레고리적 해석에 물들어 있던 그리스-로마 전통 해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해석학은 일반적으로 본문 뒤의 깊은 의미에 중점을 두다 보니, ‘표면적;이거나 덜 중요한 부분들을 희생시켜버립니다. 파란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아름다운 노란색과 짙은 갈색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이런 튀는 렌즈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원하는 여러가지 아름다움을 빼앗아 버립니다.

정의의 렌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네, 성경을 깊이 연구할때 종종 얻게 되는 놀랍고 계시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면, 실제 단어와 본문에서도 놀랍고 계시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Stephanie Buckhanon Crowder는 누가복음의 이 본문에서 과부가 “기초적 생계 수단, 곧 모든 경제적 안전을 상실했음”을 강조합니다. 아들이 없는 과부는 그녀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볼때 가장 사회 취약 계층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매일의 돌봄, 보호, 법적 필요들, 공동체적 참여 등을 위해 다른 사람의 자비에 의존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복합적 괴로움과 박탈 속에 있던 과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좀더 정의에 맞춰진 렌즈는 독자인 우리들에게 과부의 감정적 상실만 보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과부의 전인적 상태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매의 가족을 잃어 상심한 날들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힘들어할 날들도 알고 계십니다. 이 여인의 느끼고, 알고, 경험하고,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모든 것에 메시아의 긍휼이 있습니다. 이 긍휼은 과부가 살았던 현실을 빼먹지 않으며, 현재의 눈물에만 집중하지도 않습니다.

이 본문에서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우리 모두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한 부분만 아니라, 모든 것에 관심을 두십니다. 이같은 관점은 본문의 특정한 과부에게만 주어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의 복음 이해와 선언을 보여줍니다. Justo González는 이 본문이
“누가복음 전체의 주제를 잡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구절 즉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실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Drew Hart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혁명적인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정의의 렌즈를 사용하면 주제나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제 현실의 실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알레고리적 본문 읽기는 실제적 정의를 부정하고, 종말론적 정의에 대한 성화만 강조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자주 우리는 “가난한”, “사로 잡힌”, “눈먼”이란 문법적 형용사들을 단순한 은유로만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실체가 없는 은유적 모습들을 물리치도록 기도만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것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육체와 영혼으로 보셨습니다”

정의란 여기서 혁명을 위해 정치적 변동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윤리”이며 “성경적 믿음의 가장 기초”인 정의와 해방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을 인간의 실제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주는 자유와 해방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이를 선언하시고 누가복음 7장에서 잘 보여줍니다. 이 과부의 온전함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과부의 삶에 개입하시도록 한것입니다. 본문의 언어를 잘 들으세요. 예수님은 과부의 애통, 과부의 삶, 그녀가 직면한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울지 말라”(눅 7:13)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눅 7:15)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아들을 돌려 줌으로써 그녀의 아픔과 상실을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에서, 과부의 사회적 경제적 미래도 근본적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무언가 기대하는 군중들 속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이야기 중에서 고통과 어려움에만 집중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경험을 중심으로 과부의 현재 상황과 예수님이 가지고 온 새 생명은 두 무리 모두에게 – 기적과 생명의 희망을 보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생명의 희망을 잃어버린 과부를 따르던 무리-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정의 지향적인 렌즈는 독자들로 하여금 본문의 다양한 색깔과 뉘앙스를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의 아픔도 존재하지만, 그녀의 트라우마, 불안, 불확실, 사회적 경제적 상황, 가문의 미래, 취약성, 두려움 그리고 분노까지 존재합니다. 그 과부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샬롬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바램이 들어있지 않거나, 형성되지 않거나, 닿지 않은 렌즈는 성경 속의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자세히 보지 않게 하며, 실제 적용의 깊이와 다양성이 부족한 본문 해석으로 이끌어 갑니다.

결론
종종 기독교 내 정의에 대한 대화는 사회적 행동, 정치적 의제, 또는 교단적으로 나뉘어진 복음 정의가 대부분입니다. 이 글은 그런 주장들에 관여하기 보다는, 어떻게 성경을 보는냐는 방식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계시로 하나님-인간 상호작용 전체를 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너머의 뜻을 파헤치려고 하는 튀는 렌즈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의 현실을 다방면으로 보시고 긍휼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하심으로 예수님은 과부의 삶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Yolanda Pierce는 그녀의 최근 저서인 내 할머니의 집에서(In My Grandmother’s House)를 통해 빗속을 운전하는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녀는 길가에 서있는 백인 여성을 보고 도와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 갈등은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갈등은 그분이 도움을 받을 것인지 말것인지 였습니다. 그녀는 개입에 대한 그녀의 고찰을 통해 구원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에 다시 질문하면서 이 챕터를 끝맺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안전할때, 다른 공동체들, 민족들, 그리고 문화들도 안전해지고 온전해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열어 성경과 이웃을 볼 수 있을까요? 정의는 우리의 설교보다, 우리가 쓰는 책 보다, 우리가 가르치는 수업 보다 더 큽니다. 이런 것들이 정의에 속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많은 설교가들과 학자들이 자신들의 사역 핵심에서 정의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목표가 설교나, 책이나, 수업은 아닙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하나님이 애통해 하시는 것은 실제 살아 있는 현실의 중단 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볼 수 있다면, 우리 또한 긍휼을 가지고 말하고, 치유하고, 되돌려 줄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Dwight Radcliff

드와이트 래드클리프(Dwight A. Radcliff Jr.)는 윌리엄 E. 패넬 흑인교회연구센터(William E. Pannell Center for Black Church Studies)의 학장이자 선교, 신학, 문화학 조교수입니다. 그는 교육과 설교를 위해 미국 전역과 해외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고, 도시 교회 개척, 문화, 신학, 설교, 사회 정의, 밀레니얼 세대, 복음주의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신학교, 대학교, 학회에서 강의해 오고 있습니다. 그는 20년 이상의 목회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주 가디나(Gardena)에 위치한 다문화, 다세대, 도시 교회인 메시지 센터(The Message Center)의 목사로, 아내 디션 존스-래드클리프(DeShun Jones-Radcliff)와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와 아내에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Originally published

June 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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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young Yoon Hammer, chair of Fuller’s Department of Marriage and Family, considers justice and restoration in relationships from a family systems perspec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