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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갱신을 추구하며: 부흥적 신학과 저항적 신학의 연관성 시도

한국 개신교의 도래와 성장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격동이 심했던 한 시기에 일어났다. 이 기간 중 여러 가지 주요한 정치적 위기들이 있었는데,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5), 러일전쟁(1904-5), 일제의 한일합방(1910-45), 6.25 전쟁 (1950-53), 그리고 민주화 운동 (1970, 80년대)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혼돈의 이 시기에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희구했고 기독교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들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변화의 수단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수용되었다. 한반도에 기독교 (1) 의 유입은 한국의 역사에 상당히 큰 영향력을 주게 되었고, 또한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인들 자신들에 의해 독특한 양상을 갖추며 발전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즉 이데올로기, 조직, 사회 및 정치와의 관계 등은 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수용하고 그것을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맞게 해석한 한국인들에 의해 선택되고 형성되어졌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르침과 실천들에 대해 선택과 재해석의 과정이 계속 있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독특성을 지닌 한국 특유의 기독교를 만들었다. (2)

한 민족에게 기독교의 수용은 개종의 동기와 과정 그리고 지역교회의 설립과 발전에 대한 연구는 복합적인 사회-정치적 종교적 요인들로 인해 단순하지 않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과거의 개념에서 획기적인 영적 전환을 동반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매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진보와 정치 권한을 위해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촉매제로 기독교를 활용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즉, 한국의 경우, 전통적 신앙으로 부터의 단절과 새로운 종교-문화적 전환의 메시지인, “복음”을 수용한 측면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 나라의 지속적인 사회-정치적 개혁과 근대화의 일환으로 자치와 독립을 추구하는 의미에서 신앙적인 혹은 개념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며 기독교를 그 요구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서 수용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영적”이고 “세속적”인 이해는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해 모두 받아들여졌다. 초창기 북미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복음주의 부흥의 산물이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에 분리(정교분리)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그들의 탐색에 영적, 정치적 자원들을 제공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장과 부흥의 핵심 토대였던 성경을 수용하고 한편일 운동을 주도한 사회개혁 운동과 정치적 독립을 위한 자원으로 기독교를 수용한 데서 입증된다.

필자가 보는 바에는 한국에서 형성되어 온 독특한 신학은 5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의거하는 신앙; 부흥운동을 통한 전인적 축복의 추구; 가난한자와 억압받는 자에 대한 정의의 실현; 한국의 문화와 접목하는 신앙; 그리고 남북한의 화해를 추구하는 평화의 신학이다. (3) 이 글에서는 그것을 압축해서 한국교회의 신학의 특성을 “부흥적 신학”(revival theology)과 “저항적 신학”(protest theology)로 구분한다. 부흥적 신학은 성경에 대한 열렬한 헌신과 영적 체험의 추구를 강조했는데, 이는 성경공부와 부흥운동으로 맥락을 가지며 한국교회의 특성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교육, 사회-정치 조직 같은 개혁적인 활동들과 공적 참여인데, 이는 개화 운동과운동, 민주화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 두 가지 특성들은 한쪽은 영적이고 내향적이며, 다른 한쪽은 사회적이고 외향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교단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보수적, 진보적으로 구분이 되기도 한다. 저자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 두 가지 특성들이 표면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지만, 실제로 두 신학은 각자의 공동체 내에서 계속 공존하게 되며, 서로 영향을 주며, 끊임없이 맥락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며, 오늘날 교회 내의 진정한 갱신(renewal)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의 신학이 각 공동체 내에서 보다 더 창조적인 긴장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신학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사경회와 전도를 통한 부흥적 신학

세계선교 역사에서 예외적은 아니지만, 한국 기독교는 독특하게 성경을 강조하게 된다. 정식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신약성경이 이미 선교사와 한인 개종자에 의해서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이 되어서 한국에서 배포되었으며, 성경 번역과 배포를 주도한 한국인에 의해서 개신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번역과 보급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그런 배경에서 현지의 기독교인들이 성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기독교의 한국적 특별한 성격을 낳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삶과 한국 기독교의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에 있어서 성경의 도입은 선교사들의 지대한 노고가 있었지만,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주도적으로 수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일상 활동에 적용하고 기독교인의 생활에 열쇠로 만들었다. 특히 권서인들은 쪽 복음서와 신약성서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국 뿐만 아니라, 만주와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배포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들이 갖는 의미는 그들이 중국과 한반도에 있는 동포들에게 기독교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동기를 부여 받았고, 성경이 그들 활동에 핵심 매체였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19세기 후반 한반도의 사회-정치적, 문화-종교적 상황에 비추어 다양하게 이해되어야 하지만, 성경이 한국어 문자로 번역되어 여자들과 민중들이 널리 이용 가능했기 때문에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그에 따라서 성경공부가 한국 교회의 특성과 부흥에 기여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성경공부 혹은 사경회의 전통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어서 어느 한 선교사는 한국교회를 “성경 기독교 (Bible Christianity)” 라고 불렀다. (4)

성경의 가르침에 담긴 열망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이들은 이 복음을 그들의 사적 공적 생활에서 영적,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 행동의 주요 지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그 영향은 한국인들에게 근대 시기로 진입할 준비를 시키고, 사회-정치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문어, 문해력, 여성교육, 그리고 정의, 화해, 희망, 평등의 메시지들 같은 광범위한 분야들을 받아들인 것에서 입증되었다. 특히 기독교인이 된 한국 여성들은 성경을 접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사회적 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 읽기를 배우도록 기대되었고, 또한 글을 읽고 신문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남성들의 공적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여성 교육은 가부장제의 형식들과 이성간 도덕성의 이중 잣대들에 의문을 제기함에 따라 전통적인 경직된 유교 질서를 도전하는 요인들 중에 하나였다.(5)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교회 안에서 새롭고 보다 강력한 연결망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문맹퇴치 캠페인을 벌이고, 금주 운동을 시작하고, 그리고 축첩제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6) 남성과 여성의 세계 사이에 구획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공적 생활에 대한 고려에 방해 받지 않고 여성들 사이에서 확산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성들은 지역 기도모임이나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예배”의 리더들이었다. 개종자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신앙간증을 하고 그들에게 교회에 나가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열정은 사경회(Bible-study meeting)를 통해서 부흥회(revival meeting)로 연결이 되었다. 부흥은 한국교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알려져 왔으며, 한국교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해해야 한다. 20세기 초부터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주도했던 일련의 부흥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체험하는 한국교회의 관행에 몇 가지 역동성을 가져왔고, 이것이 그들에게 어려운 시절에도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 부흥회는 죄사함, 개인과 민족의 구원 같은 축복을 구했고. 설교자들의 메시지와 회중들의 기대는 이 세상 너머에 그 무언가로 향했다. 1903-1907년의 한국의 대부흥 운동은 성결운동에서 비롯되어 확산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전세계적인 부흥 현상의 일부였는데, 이것은 또한 오늘날 오순절운동과 카리스마적 형태의 기독교를 낳은 것으로도 보인다. (7) 그러나 전세계적인 운동에 속한다 할지라도, 한국의 부흥은 20세기 초 민족적 위기 대한 영적 문화적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부흥은 일본이 나라를 점령하는 가운데 한반도에 도래하는 고통과 공포를 쏟아낼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기회가 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네 가지 이유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첫째, 그것을 통해 교회는 두드러지게 한국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대부흥은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종교적 관행들을 형성시킨 것은 “한국의 오순절”이었으며, 선교적 복음주의 전통과 한국교회를 민족종교로 주조하는 민족 구원을 향한 한국인의 희망의 융합이었다. (8) 둘째, 부흥은 다른 종교들과 가톨릭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시대정신의 어떤 것을 포착했고 한국문화와 연결시켰기 때문인데, 이런 점이 기독교에 대해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져다 주었다. 부흥을 통해, 기독교는 지적이고 사회적인 개혁운동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또한 감성적으로 깊이 표현하는 종교운동으로 드러났다. (9) 구약과 복음서의 언어는 억압 가운데 있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기독교가 대중 언어인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대중적인 믿음과의 연속성을 용이하게 했다. 더욱이, 부흥회의 영성은 공동 노래, 황홀한 기도, 일상의 기도 형식 그리고 금주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적 형태들과 연결되었다. (10) 셋째, 부흥회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을 하나로 끌어 모았다. 유교 엘리트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개념에서는 신앙의 뜨거움을 경험하는 부흥은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부흥을 통해 유교를 믿는 이들은 물론, 불교, 전통 종교 그리고 새로운 종교 운동들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차를 가능하게 했다. (11) 부흥운동은 단지 감성에 호소하는 일시적인 현상이기 보다는 이로 인해서 성경을 더 깊이 접하게 되고 개인의 윤리적 변화, 사회적 책임을 동반하는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이전에 한국에서 서로 다른 종교들과 철학들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을 하나의 운동 속으로 끌어들이고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세력이었다. 대부흥은 서양인들과 아시아인들에게 종교가 다르다는 인식을 무너뜨렸고, 한국인의 지도력에 대해 선교사들의 신뢰와 진정한 상호관계를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넷째, 영성과 고백이 표면적으로는 고백하는 이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국한되었다 할지라도, 개인적인 회개와 의는 신학적으로 민족의 재난과 정의를 위한 투쟁과 연결되었다. 대부흥회는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천국에 대한 단순히 영적인 면만이 아닌 보다 폭넓은 희망을 장려하게 되었다.

부흥에 대한 추구와 개신교회의 성장은 해방 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각 교회의 부흥회 뿐 아니라 대형 부흥집회를 통해서 또한 초대형교회의 확산으로 인해서 부흥은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12) 그러나 성장 위주의 부흥운동은 1980년 대 이후로 교회 안팎으로 비판을 받게 되고 사회에서의 교회의 공공성과 신뢰성에 대해서 활발하게 토의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한국교회의 다른 한 면인 저항을 추구하는 운동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사회개혁과 사회-정치 참여를 통한 저항적 신학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이해는 경건한 생활방식으로 보수적이라는 것이 기정 사실이었지만, 그들의 사역은 교육, 의료사업, 청년사업, 여성단체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도 두루 망라했다. 이러한 폭넓은 사역들은 주로 그들의 선교사업에 있어서의 제약들로 인해서 또한 일반 대중에게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정치 지도층들 사이에서 호의를 얻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자, 한국의 엘리트들과 교육받은 개혁가들은 기독교를 서양식의 학교, 병원, 신문 그리고 출판물을 통해 한국을 근대화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해주었고 필요한 허가들을 승인해주었다. 많은 저명한 개혁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지식인들과 일반인들 속에서도 기독교의 수용과 정치적 독립 및 사회개혁의 추구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억압적인 통치 계급과 외세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기를 원했다. 개종자 중에 사회지도자들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중국과 유교적 전통에 대한 의존이 종식된 지금 한국을 재건하려는 사회개혁의 하나로, “준-정치적 교리”로 이해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자립이라는 의미에서 “독립”을 주된 목표로 옹호하며 외세에 대한 한국의 전반적인 의존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제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교회, 학교, 언론을 통해 서구적 가치들과 사회적 책임에 관한 자유로운 발언과 교육으로 사람들을 각성시켜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가져오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 (13)

사회 계급이 어떠하든, 개종자들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개인적 변화 뿐만 아니라, 사회개혁의 하나로 이해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는 특히 개종, 개인적 양심 그리고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여 기독교인들은 출생에 의해 결정된 인생의 신분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개인의 인생에서 다시 태어나 선을 행하고 발전하도록 권장되었다. 더군다나, 장로교의 정치는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다. 둘째, 선교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사회의 엄격한 위계와 군주에 대한 절대 복종에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의료시설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다 치료해주었다. 초기 가톨릭처럼, 개신교 또한 천민들을 해방시키려고 시도했는데,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들의 신분은 1895년의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셋째, 학교의 설립과 한글의 진흥을 통해 여성을 포함한 문맹자와 이전에 학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 역사, 글씨를 알게 해주었는데, 이는 교육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부심에도 기여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활동들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넷째, 교회를 통해 제공되는 광범위한 교육, 기독교 기관들 그리고 신문들은 서양의 과학기술 지식, 역사의식 그리고 도덕성을 전달해주었고, 유교적 아카데미를 지배하는 경직되고 관료적인 사회보다는 무한이 열린 탐구를 장려하고, 미신을 무너뜨리고, 전통 의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또 사회 개선을 위한 사회적 양심과 운동들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자유와 사회정의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정치적 상황이 급속히 변하는 와중에, 교회들은 근대적 생활방식과 규율의 형태, 조직과 회계 시스템, 그리고 토론방식들을 도입함으로써 근대화로의 이행에 하나의 촉매제로서 작용했다. 기독교의 성장은 또한 학교의 성장을 의미했고 곧 현대식 교육의 길로 이끌었다. 교회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한 요소를 형성했고 학교는 함께 네트워크로 연결된 새로운 엘리트의 형성을 촉진하게 되었다. 민족의 위기 때,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어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촉매제로 보았고 근대화 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받아들였고, 또 민족-건설의 명분으로 기독교를 구체화했다.

이러한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갱신의 촉매제(catalyst)로서 기독교의 역할이 범 국민적인 정치적인 운동으로 표출 된 것은 3.1 독립운동이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을 일제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진출에 반대하는 운동에 관여했다. 즉 민족을 위한 구국 기도회를 조직하고, 그 조약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고, 심지어 항거의 표시로 자결까지 하고, 일본과 한국 관리들의 암살을 시도하고, 일본 군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조직하고, 총독부가 징수하는 세금에 대해 방해공작을 벌이고, 정당들과 사회집단들을 결성했다운동은 종교운동은 아니었지만, 관련된 주요 단체들이 종교단체들, 주로 기독교와 천도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통계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독립 투쟁에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 운동은 주로 해외 민족주의자들의 독려를 받아 한국의 학생들, 교육자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조직했고, 기독교인들이 주요 선동자들 가운데 들어있었다. 청소년, 학생들, 교사들, 도시 노동자들 그리고 상인들은 몇 주 동안 시위를 계속했고 귀가한 후에도 곧바로 그 운동을 도시로부터 농촌지역까지 퍼뜨려서운동을 진정한 전국적인 규모로 만들었다. 전국적인 기독교 네트워크는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교회들이 제도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교회 재산이 시위를 위해 빈번히 사용되었다. (14) 체포된 489명의 성직자 중 절반이 기독교 목사였다. 서울과 평양의 거의 모든 목사들이 투옥되었고, 다른 많은 교회 사역자들도 투옥되었다. (15)독립운동의 가장 놀라운 양상들 중에 하나는 여성들과 소녀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의 수가 겨우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한 20만 명에 불과할 때 기독교인들의 참여는 매우 높았으며, 특히 기독교 여성은 체포된 471명 중 60%를 차지했고 이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여성들 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선교사 교장은 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화학교 학생들은 서울에서 벌어졌던 행렬의 맨 앞에서 행진했고, 여러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하고 투옥되었다.(16)

이러한 저항 운동은 해방 후 계속해서 민중운동 그리고 민주화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60대 이후 한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을 하게 되는데 한편으로 그 결과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 조건과 임금에 대한 심각한 착취가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 시장의 희생양이 된 도시 빈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신학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착취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빈부 격차, 고용인과 고용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민중 운동은 1970년 11월 전태일 이 공장 동료 착취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촉발됐다. 이 사건은 나라를 뒤흔들었고 곧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것을 주요 문제로 받아들이고 가난한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

민중 신학자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빈곤과 착취 문제를 교회에 가져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 신학을 불의와 착취에 반대 하는 민중 을 대표하는 “저항”의 신학으로 본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개별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그들의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과정과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민중 신학자들은 경제적, 정치적 불의를 다루려고 함에 따라 민중 자신 보다 반 민중 의 무엇에 더 관심을 갖는다. 민중 신학은 해방과 정의의 복음을 재발견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그들이 착취의 대상이 아니며 착취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며 그들의 항의가 정당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민중 신학은 가난한 자에게 희소식이었고 전인적 축복의 복음처럼 가난한 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식별하고 처리하는 방법에서 후자와 크게 다르다. 전반적으로 민중 신학은 사회경제적, 정치적 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와 사회에 도전 했고, 1980년대 후반 한국에 민주주의를 이룩했으며, 한국 역사에서 “예언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계몽운동, 3.1운동, 민주화 운동 등으로 표현되는 저항적인 신학은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기 보다는 주로 진보적인 교단과 교회를 통해서 한국교회와 사회에 도전적인 메시지를 주고있다.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적 신학과 저항적 신학의 만남

위의 두 신학적 전통을 다루면서 일반적으로 토론되는 견해는 이 두가지 전통을 지나치게 양분화하는 경향이 있다. 즉 진보적인 교단과 보수적인 교단이나 교회를 양분화 하여 이해하고, 보다 건전하고 성숙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상호 대화와 상호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글에서 각자의 전통 내에서 다양한 신학이 공존하며, 지속 가능한 갱신을 위해서는 그러한 다양한 신학이 각 전통에 내부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재해석하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위에서 다룬 부흥회와 3.1운동을 재 조명하기로 한다.

한국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비정치적이거나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비판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경공부와 대 부흥회를 경험한 교인들이 몇 년 후에 있는독립운동을 비롯한 민족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대부흥의 경과가 단지 영적이라고 만 볼 수 없다. 오히려 내면의 영적, 윤리적 쇄신을 강조하고, 신앙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극복하고,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지도력을 강화함으로써, 전인적 신앙을 유지하는 등 기독교가 성숙하는 과정에 촉매제가 되었다고 본다. 필자는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 특히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지혜와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공적 생활에서 기독교인의 공적 생활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 한국인들에게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안에서 민족의 회복이었다. 비록 부흥은 교회를 현실도피적으로 유도한 경향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부흥은 기독교의 민족화를 초래한 것 뿐 아니라 민족에 대한 영적 의미를 부여함으로 교회를 민족주의와 깊이 있게 연결시켰다.

부흥운동은 단지 현상적인 상황변화에서 떠나서 전체적으로 기독교의 한국적 수용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영적-문화적이기도 하고 사회-정치적이기도 하며, 또 “저 세상적(내세적)”이기도 하고 “이 세상적(세속적)”인 적용이 모두 들어있는 기독교의 전체론적 차원을 구현하면서 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필자는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공적 생활의 토대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부흥운동은 표면적으로 기독교 생활의 영적, 종말론적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보였지만,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특히운동 기간에 참여한 여러 지도자들이 부흥운동을 주도하였고, 이 운동의 기본을 이루는 비폭력 운동도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지켜온 평화적인 데모를 이끌어 온 면이라고 보겠다. 부흥운동은 비정치적 도피주의가 아니라 괴로움을 당하는 민족 안에서 개인 또는 공동체라는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민족적 투쟁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이스라엘을 인도 하였던 야훼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갈망을 표현하고 신앙적인 도움을 구하는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3.1 독립운동을 재 조명 한다면, 이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전히 정치적 운동은 아니며,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로서 기독교 복음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독립선언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기독교 메시지가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매우 “세속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공적 담론을 위한 기독교 신앙의 비전을 통합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독립선언문은 한국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공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분수령이었던운동 시위 이후, 실제 항거 활동은 약화되었지만, 억압과 불의에 도전하는 정신은 기독교의 전통에서 계속 구현되었고 그 후로도 한국의 역사에서 수시로 표면화 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도 표면적으로는 급진적이고 세속적으로 보여지지만 그 내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정의와 공평,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복음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이 운동이 전재되게 되었다. 사회의 격동기에, 한국 기독교는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갱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이런 영향은 의미 있는 삶에 대한 한국인의 영적인 추구를 만족시키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영감과, 존엄성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촉매제의 원천으로 기독교를 주로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행동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과 행동으로 진정한 신자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깊은 열망의 표현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의 시기 동안에 교회지도자들을 배출 했을 뿐만 아니라, 개혁운동의 수많은 핵심 지도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그들로 인해서 독특한 한국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편으로, 성경에 대한 열렬한 헌신과 영적 체험을 갈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의와 억압 속에서도 회복력과 항거를 그 특징으로 한다. 기독교인들이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그 다음엔 민족에 대한 그들 나름의 기독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에 기여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교회에는 정치적 개혁과 영적-문화적 전환이라는 이 두 가지 외견상 상반되는 차원들이 초창기 기독교 역사로 부터 현재까지 실제로 깊이 연관성을 갖고 서로 수용과 갈등을 겪으며 공존 한다고 본다.

한국의 기독교는 마치 이념적 신학적인 차이들로 인해 분리된 것처럼 보여지고, 때로는 너무 급진적이고 진보적이거나, 아니면 너무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지만, 대다수의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위기 속에서 이 두 가지 차원의 기독교 신앙을 함께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격동의 시대를 지내면서, 그들의 모든 부족함, 실패, 그리고 약점에도 불구하고 새로 받아들인 종교인 기독교를 나름대로 온전하게, 신실하게, 그리고 깊은 헌신을 통해서 기독교가 한반도에 자리잡는데 기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기독교에서 부흥적 기독교와 저항적 기독교 정신이 뚜렷이 그 맥락을 이어가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가 항상 창조적 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어떤 중도의 신학을 추구하자는 제안은 아니다. 교회 공동체나 개인이 항상 중도를 지향할 수 없으며 각자의 신학에서 강조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바람직하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각 교회공동체가 각자의 신학적인 강조점을 유지하면서 다른 성향의 신학을 인정하고 비평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대부흥운동과 독립운동에서 다룬 데로, 깊이 있게 관찰하게 되면 내면에 흐르는 양면성이 있는 것을 본다. 이를 위해서 이 두 전통이 서로 대화를 통해서 보다 성숙한 한국의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보다 지속 가능한 갱신(sustainable church renewal)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자의 전통 내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른 신학적 성향 – 부흥(revival) 과 저항(protest) – 에 대해서 보다 더 진지하게 인식하며 또한 비평적으로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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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교수는 로버트 와일리 공공신학 석좌교수이자 코리안 센터의 학장입니다. 그는 영국과 인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대학과 신학교에서 폭넓은 강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Royal Asiatic Society의 펠로우, Global Network for Public Theology의 집행위원, Society for the Study of Theology의 회원입니다. 김 박사는 공공신학, 세계기독교, 아시아신학, 신학과 평화구축과 같은 주제에 대해 폭넓게 저술과 출판을 해왔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공동 저술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도래와 성장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격동이 심했던 한 시기에 일어났다. 이 기간 중 여러 가지 주요한 정치적 위기들이 있었는데,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5), 러일전쟁(1904-5), 일제의 한일합방(1910-45), 6.25 전쟁 (1950-53), 그리고 민주화 운동 (1970, 80년대)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혼돈의 이 시기에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희구했고 기독교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들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변화의 수단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수용되었다. 한반도에 기독교 (1) 의 유입은 한국의 역사에 상당히 큰 영향력을 주게 되었고, 또한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인들 자신들에 의해 독특한 양상을 갖추며 발전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즉 이데올로기, 조직, 사회 및 정치와의 관계 등은 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수용하고 그것을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맞게 해석한 한국인들에 의해 선택되고 형성되어졌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르침과 실천들에 대해 선택과 재해석의 과정이 계속 있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독특성을 지닌 한국 특유의 기독교를 만들었다. (2)

한 민족에게 기독교의 수용은 개종의 동기와 과정 그리고 지역교회의 설립과 발전에 대한 연구는 복합적인 사회-정치적 종교적 요인들로 인해 단순하지 않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과거의 개념에서 획기적인 영적 전환을 동반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매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진보와 정치 권한을 위해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촉매제로 기독교를 활용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즉, 한국의 경우, 전통적 신앙으로 부터의 단절과 새로운 종교-문화적 전환의 메시지인, “복음”을 수용한 측면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 나라의 지속적인 사회-정치적 개혁과 근대화의 일환으로 자치와 독립을 추구하는 의미에서 신앙적인 혹은 개념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며 기독교를 그 요구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서 수용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영적”이고 “세속적”인 이해는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해 모두 받아들여졌다. 초창기 북미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복음주의 부흥의 산물이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에 분리(정교분리)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그들의 탐색에 영적, 정치적 자원들을 제공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장과 부흥의 핵심 토대였던 성경을 수용하고 한편일 운동을 주도한 사회개혁 운동과 정치적 독립을 위한 자원으로 기독교를 수용한 데서 입증된다.

필자가 보는 바에는 한국에서 형성되어 온 독특한 신학은 5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의거하는 신앙; 부흥운동을 통한 전인적 축복의 추구; 가난한자와 억압받는 자에 대한 정의의 실현; 한국의 문화와 접목하는 신앙; 그리고 남북한의 화해를 추구하는 평화의 신학이다. (3) 이 글에서는 그것을 압축해서 한국교회의 신학의 특성을 “부흥적 신학”(revival theology)과 “저항적 신학”(protest theology)로 구분한다. 부흥적 신학은 성경에 대한 열렬한 헌신과 영적 체험의 추구를 강조했는데, 이는 성경공부와 부흥운동으로 맥락을 가지며 한국교회의 특성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교육, 사회-정치 조직 같은 개혁적인 활동들과 공적 참여인데, 이는 개화 운동과운동, 민주화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 두 가지 특성들은 한쪽은 영적이고 내향적이며, 다른 한쪽은 사회적이고 외향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교단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보수적, 진보적으로 구분이 되기도 한다. 저자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 두 가지 특성들이 표면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지만, 실제로 두 신학은 각자의 공동체 내에서 계속 공존하게 되며, 서로 영향을 주며, 끊임없이 맥락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며, 오늘날 교회 내의 진정한 갱신(renewal)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의 신학이 각 공동체 내에서 보다 더 창조적인 긴장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신학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사경회와 전도를 통한 부흥적 신학

세계선교 역사에서 예외적은 아니지만, 한국 기독교는 독특하게 성경을 강조하게 된다. 정식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신약성경이 이미 선교사와 한인 개종자에 의해서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이 되어서 한국에서 배포되었으며, 성경 번역과 배포를 주도한 한국인에 의해서 개신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번역과 보급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그런 배경에서 현지의 기독교인들이 성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기독교의 한국적 특별한 성격을 낳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삶과 한국 기독교의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에 있어서 성경의 도입은 선교사들의 지대한 노고가 있었지만,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주도적으로 수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일상 활동에 적용하고 기독교인의 생활에 열쇠로 만들었다. 특히 권서인들은 쪽 복음서와 신약성서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국 뿐만 아니라, 만주와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배포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들이 갖는 의미는 그들이 중국과 한반도에 있는 동포들에게 기독교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동기를 부여 받았고, 성경이 그들 활동에 핵심 매체였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19세기 후반 한반도의 사회-정치적, 문화-종교적 상황에 비추어 다양하게 이해되어야 하지만, 성경이 한국어 문자로 번역되어 여자들과 민중들이 널리 이용 가능했기 때문에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그에 따라서 성경공부가 한국 교회의 특성과 부흥에 기여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성경공부 혹은 사경회의 전통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어서 어느 한 선교사는 한국교회를 “성경 기독교 (Bible Christianity)” 라고 불렀다. (4)

성경의 가르침에 담긴 열망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이들은 이 복음을 그들의 사적 공적 생활에서 영적,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 행동의 주요 지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그 영향은 한국인들에게 근대 시기로 진입할 준비를 시키고, 사회-정치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문어, 문해력, 여성교육, 그리고 정의, 화해, 희망, 평등의 메시지들 같은 광범위한 분야들을 받아들인 것에서 입증되었다. 특히 기독교인이 된 한국 여성들은 성경을 접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사회적 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 읽기를 배우도록 기대되었고, 또한 글을 읽고 신문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남성들의 공적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여성 교육은 가부장제의 형식들과 이성간 도덕성의 이중 잣대들에 의문을 제기함에 따라 전통적인 경직된 유교 질서를 도전하는 요인들 중에 하나였다.(5)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교회 안에서 새롭고 보다 강력한 연결망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문맹퇴치 캠페인을 벌이고, 금주 운동을 시작하고, 그리고 축첩제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6) 남성과 여성의 세계 사이에 구획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공적 생활에 대한 고려에 방해 받지 않고 여성들 사이에서 확산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성들은 지역 기도모임이나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예배”의 리더들이었다. 개종자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신앙간증을 하고 그들에게 교회에 나가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열정은 사경회(Bible-study meeting)를 통해서 부흥회(revival meeting)로 연결이 되었다. 부흥은 한국교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알려져 왔으며, 한국교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해해야 한다. 20세기 초부터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주도했던 일련의 부흥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체험하는 한국교회의 관행에 몇 가지 역동성을 가져왔고, 이것이 그들에게 어려운 시절에도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 부흥회는 죄사함, 개인과 민족의 구원 같은 축복을 구했고. 설교자들의 메시지와 회중들의 기대는 이 세상 너머에 그 무언가로 향했다. 1903-1907년의 한국의 대부흥 운동은 성결운동에서 비롯되어 확산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전세계적인 부흥 현상의 일부였는데, 이것은 또한 오늘날 오순절운동과 카리스마적 형태의 기독교를 낳은 것으로도 보인다. (7) 그러나 전세계적인 운동에 속한다 할지라도, 한국의 부흥은 20세기 초 민족적 위기 대한 영적 문화적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부흥은 일본이 나라를 점령하는 가운데 한반도에 도래하는 고통과 공포를 쏟아낼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기회가 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네 가지 이유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첫째, 그것을 통해 교회는 두드러지게 한국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대부흥은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종교적 관행들을 형성시킨 것은 “한국의 오순절”이었으며, 선교적 복음주의 전통과 한국교회를 민족종교로 주조하는 민족 구원을 향한 한국인의 희망의 융합이었다. (8) 둘째, 부흥은 다른 종교들과 가톨릭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시대정신의 어떤 것을 포착했고 한국문화와 연결시켰기 때문인데, 이런 점이 기독교에 대해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져다 주었다. 부흥을 통해, 기독교는 지적이고 사회적인 개혁운동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또한 감성적으로 깊이 표현하는 종교운동으로 드러났다. (9) 구약과 복음서의 언어는 억압 가운데 있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기독교가 대중 언어인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대중적인 믿음과의 연속성을 용이하게 했다. 더욱이, 부흥회의 영성은 공동 노래, 황홀한 기도, 일상의 기도 형식 그리고 금주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적 형태들과 연결되었다. (10) 셋째, 부흥회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을 하나로 끌어 모았다. 유교 엘리트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개념에서는 신앙의 뜨거움을 경험하는 부흥은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부흥을 통해 유교를 믿는 이들은 물론, 불교, 전통 종교 그리고 새로운 종교 운동들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차를 가능하게 했다. (11) 부흥운동은 단지 감성에 호소하는 일시적인 현상이기 보다는 이로 인해서 성경을 더 깊이 접하게 되고 개인의 윤리적 변화, 사회적 책임을 동반하는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이전에 한국에서 서로 다른 종교들과 철학들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을 하나의 운동 속으로 끌어들이고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세력이었다. 대부흥은 서양인들과 아시아인들에게 종교가 다르다는 인식을 무너뜨렸고, 한국인의 지도력에 대해 선교사들의 신뢰와 진정한 상호관계를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넷째, 영성과 고백이 표면적으로는 고백하는 이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국한되었다 할지라도, 개인적인 회개와 의는 신학적으로 민족의 재난과 정의를 위한 투쟁과 연결되었다. 대부흥회는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천국에 대한 단순히 영적인 면만이 아닌 보다 폭넓은 희망을 장려하게 되었다.

부흥에 대한 추구와 개신교회의 성장은 해방 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각 교회의 부흥회 뿐 아니라 대형 부흥집회를 통해서 또한 초대형교회의 확산으로 인해서 부흥은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12) 그러나 성장 위주의 부흥운동은 1980년 대 이후로 교회 안팎으로 비판을 받게 되고 사회에서의 교회의 공공성과 신뢰성에 대해서 활발하게 토의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한국교회의 다른 한 면인 저항을 추구하는 운동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사회개혁과 사회-정치 참여를 통한 저항적 신학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이해는 경건한 생활방식으로 보수적이라는 것이 기정 사실이었지만, 그들의 사역은 교육, 의료사업, 청년사업, 여성단체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도 두루 망라했다. 이러한 폭넓은 사역들은 주로 그들의 선교사업에 있어서의 제약들로 인해서 또한 일반 대중에게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정치 지도층들 사이에서 호의를 얻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자, 한국의 엘리트들과 교육받은 개혁가들은 기독교를 서양식의 학교, 병원, 신문 그리고 출판물을 통해 한국을 근대화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해주었고 필요한 허가들을 승인해주었다. 많은 저명한 개혁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지식인들과 일반인들 속에서도 기독교의 수용과 정치적 독립 및 사회개혁의 추구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억압적인 통치 계급과 외세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기를 원했다. 개종자 중에 사회지도자들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중국과 유교적 전통에 대한 의존이 종식된 지금 한국을 재건하려는 사회개혁의 하나로, “준-정치적 교리”로 이해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자립이라는 의미에서 “독립”을 주된 목표로 옹호하며 외세에 대한 한국의 전반적인 의존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제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교회, 학교, 언론을 통해 서구적 가치들과 사회적 책임에 관한 자유로운 발언과 교육으로 사람들을 각성시켜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가져오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 (13)

사회 계급이 어떠하든, 개종자들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개인적 변화 뿐만 아니라, 사회개혁의 하나로 이해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는 특히 개종, 개인적 양심 그리고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여 기독교인들은 출생에 의해 결정된 인생의 신분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개인의 인생에서 다시 태어나 선을 행하고 발전하도록 권장되었다. 더군다나, 장로교의 정치는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다. 둘째, 선교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사회의 엄격한 위계와 군주에 대한 절대 복종에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의료시설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다 치료해주었다. 초기 가톨릭처럼, 개신교 또한 천민들을 해방시키려고 시도했는데,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들의 신분은 1895년의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셋째, 학교의 설립과 한글의 진흥을 통해 여성을 포함한 문맹자와 이전에 학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 역사, 글씨를 알게 해주었는데, 이는 교육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부심에도 기여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활동들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넷째, 교회를 통해 제공되는 광범위한 교육, 기독교 기관들 그리고 신문들은 서양의 과학기술 지식, 역사의식 그리고 도덕성을 전달해주었고, 유교적 아카데미를 지배하는 경직되고 관료적인 사회보다는 무한이 열린 탐구를 장려하고, 미신을 무너뜨리고, 전통 의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또 사회 개선을 위한 사회적 양심과 운동들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자유와 사회정의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정치적 상황이 급속히 변하는 와중에, 교회들은 근대적 생활방식과 규율의 형태, 조직과 회계 시스템, 그리고 토론방식들을 도입함으로써 근대화로의 이행에 하나의 촉매제로서 작용했다. 기독교의 성장은 또한 학교의 성장을 의미했고 곧 현대식 교육의 길로 이끌었다. 교회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한 요소를 형성했고 학교는 함께 네트워크로 연결된 새로운 엘리트의 형성을 촉진하게 되었다. 민족의 위기 때,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어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촉매제로 보았고 근대화 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받아들였고, 또 민족-건설의 명분으로 기독교를 구체화했다.

이러한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갱신의 촉매제(catalyst)로서 기독교의 역할이 범 국민적인 정치적인 운동으로 표출 된 것은 3.1 독립운동이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을 일제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진출에 반대하는 운동에 관여했다. 즉 민족을 위한 구국 기도회를 조직하고, 그 조약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고, 심지어 항거의 표시로 자결까지 하고, 일본과 한국 관리들의 암살을 시도하고, 일본 군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조직하고, 총독부가 징수하는 세금에 대해 방해공작을 벌이고, 정당들과 사회집단들을 결성했다운동은 종교운동은 아니었지만, 관련된 주요 단체들이 종교단체들, 주로 기독교와 천도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통계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독립 투쟁에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 운동은 주로 해외 민족주의자들의 독려를 받아 한국의 학생들, 교육자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조직했고, 기독교인들이 주요 선동자들 가운데 들어있었다. 청소년, 학생들, 교사들, 도시 노동자들 그리고 상인들은 몇 주 동안 시위를 계속했고 귀가한 후에도 곧바로 그 운동을 도시로부터 농촌지역까지 퍼뜨려서운동을 진정한 전국적인 규모로 만들었다. 전국적인 기독교 네트워크는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교회들이 제도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교회 재산이 시위를 위해 빈번히 사용되었다. (14) 체포된 489명의 성직자 중 절반이 기독교 목사였다. 서울과 평양의 거의 모든 목사들이 투옥되었고, 다른 많은 교회 사역자들도 투옥되었다. (15)독립운동의 가장 놀라운 양상들 중에 하나는 여성들과 소녀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의 수가 겨우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한 20만 명에 불과할 때 기독교인들의 참여는 매우 높았으며, 특히 기독교 여성은 체포된 471명 중 60%를 차지했고 이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여성들 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선교사 교장은 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화학교 학생들은 서울에서 벌어졌던 행렬의 맨 앞에서 행진했고, 여러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하고 투옥되었다.(16)

이러한 저항 운동은 해방 후 계속해서 민중운동 그리고 민주화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60대 이후 한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을 하게 되는데 한편으로 그 결과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 조건과 임금에 대한 심각한 착취가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 시장의 희생양이 된 도시 빈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신학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착취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빈부 격차, 고용인과 고용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민중 운동은 1970년 11월 전태일 이 공장 동료 착취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촉발됐다. 이 사건은 나라를 뒤흔들었고 곧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것을 주요 문제로 받아들이고 가난한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

민중 신학자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빈곤과 착취 문제를 교회에 가져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 신학을 불의와 착취에 반대 하는 민중 을 대표하는 “저항”의 신학으로 본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개별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그들의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과정과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민중 신학자들은 경제적, 정치적 불의를 다루려고 함에 따라 민중 자신 보다 반 민중 의 무엇에 더 관심을 갖는다. 민중 신학은 해방과 정의의 복음을 재발견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그들이 착취의 대상이 아니며 착취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며 그들의 항의가 정당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민중 신학은 가난한 자에게 희소식이었고 전인적 축복의 복음처럼 가난한 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식별하고 처리하는 방법에서 후자와 크게 다르다. 전반적으로 민중 신학은 사회경제적, 정치적 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와 사회에 도전 했고, 1980년대 후반 한국에 민주주의를 이룩했으며, 한국 역사에서 “예언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계몽운동, 3.1운동, 민주화 운동 등으로 표현되는 저항적인 신학은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기 보다는 주로 진보적인 교단과 교회를 통해서 한국교회와 사회에 도전적인 메시지를 주고있다.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적 신학과 저항적 신학의 만남

위의 두 신학적 전통을 다루면서 일반적으로 토론되는 견해는 이 두가지 전통을 지나치게 양분화하는 경향이 있다. 즉 진보적인 교단과 보수적인 교단이나 교회를 양분화 하여 이해하고, 보다 건전하고 성숙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상호 대화와 상호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글에서 각자의 전통 내에서 다양한 신학이 공존하며, 지속 가능한 갱신을 위해서는 그러한 다양한 신학이 각 전통에 내부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재해석하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위에서 다룬 부흥회와 3.1운동을 재 조명하기로 한다.

한국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비정치적이거나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비판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경공부와 대 부흥회를 경험한 교인들이 몇 년 후에 있는독립운동을 비롯한 민족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대부흥의 경과가 단지 영적이라고 만 볼 수 없다. 오히려 내면의 영적, 윤리적 쇄신을 강조하고, 신앙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극복하고,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지도력을 강화함으로써, 전인적 신앙을 유지하는 등 기독교가 성숙하는 과정에 촉매제가 되었다고 본다. 필자는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 특히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지혜와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공적 생활에서 기독교인의 공적 생활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 한국인들에게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안에서 민족의 회복이었다. 비록 부흥은 교회를 현실도피적으로 유도한 경향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부흥은 기독교의 민족화를 초래한 것 뿐 아니라 민족에 대한 영적 의미를 부여함으로 교회를 민족주의와 깊이 있게 연결시켰다.

부흥운동은 단지 현상적인 상황변화에서 떠나서 전체적으로 기독교의 한국적 수용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영적-문화적이기도 하고 사회-정치적이기도 하며, 또 “저 세상적(내세적)”이기도 하고 “이 세상적(세속적)”인 적용이 모두 들어있는 기독교의 전체론적 차원을 구현하면서 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필자는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공적 생활의 토대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부흥운동은 표면적으로 기독교 생활의 영적, 종말론적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보였지만,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특히운동 기간에 참여한 여러 지도자들이 부흥운동을 주도하였고, 이 운동의 기본을 이루는 비폭력 운동도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지켜온 평화적인 데모를 이끌어 온 면이라고 보겠다. 부흥운동은 비정치적 도피주의가 아니라 괴로움을 당하는 민족 안에서 개인 또는 공동체라는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민족적 투쟁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이스라엘을 인도 하였던 야훼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갈망을 표현하고 신앙적인 도움을 구하는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3.1 독립운동을 재 조명 한다면, 이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전히 정치적 운동은 아니며,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로서 기독교 복음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독립선언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기독교 메시지가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매우 “세속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공적 담론을 위한 기독교 신앙의 비전을 통합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독립선언문은 한국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공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분수령이었던운동 시위 이후, 실제 항거 활동은 약화되었지만, 억압과 불의에 도전하는 정신은 기독교의 전통에서 계속 구현되었고 그 후로도 한국의 역사에서 수시로 표면화 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도 표면적으로는 급진적이고 세속적으로 보여지지만 그 내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정의와 공평,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복음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이 운동이 전재되게 되었다. 사회의 격동기에, 한국 기독교는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갱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이런 영향은 의미 있는 삶에 대한 한국인의 영적인 추구를 만족시키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영감과, 존엄성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촉매제의 원천으로 기독교를 주로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행동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과 행동으로 진정한 신자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깊은 열망의 표현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의 시기 동안에 교회지도자들을 배출 했을 뿐만 아니라, 개혁운동의 수많은 핵심 지도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그들로 인해서 독특한 한국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편으로, 성경에 대한 열렬한 헌신과 영적 체험을 갈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의와 억압 속에서도 회복력과 항거를 그 특징으로 한다. 기독교인들이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그 다음엔 민족에 대한 그들 나름의 기독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에 기여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교회에는 정치적 개혁과 영적-문화적 전환이라는 이 두 가지 외견상 상반되는 차원들이 초창기 기독교 역사로 부터 현재까지 실제로 깊이 연관성을 갖고 서로 수용과 갈등을 겪으며 공존 한다고 본다.

한국의 기독교는 마치 이념적 신학적인 차이들로 인해 분리된 것처럼 보여지고, 때로는 너무 급진적이고 진보적이거나, 아니면 너무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지만, 대다수의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위기 속에서 이 두 가지 차원의 기독교 신앙을 함께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격동의 시대를 지내면서, 그들의 모든 부족함, 실패, 그리고 약점에도 불구하고 새로 받아들인 종교인 기독교를 나름대로 온전하게, 신실하게, 그리고 깊은 헌신을 통해서 기독교가 한반도에 자리잡는데 기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기독교에서 부흥적 기독교와 저항적 기독교 정신이 뚜렷이 그 맥락을 이어가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가 항상 창조적 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어떤 중도의 신학을 추구하자는 제안은 아니다. 교회 공동체나 개인이 항상 중도를 지향할 수 없으며 각자의 신학에서 강조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바람직하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각 교회공동체가 각자의 신학적인 강조점을 유지하면서 다른 성향의 신학을 인정하고 비평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대부흥운동과 독립운동에서 다룬 데로, 깊이 있게 관찰하게 되면 내면에 흐르는 양면성이 있는 것을 본다. 이를 위해서 이 두 전통이 서로 대화를 통해서 보다 성숙한 한국의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보다 지속 가능한 갱신(sustainable church renewal)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자의 전통 내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른 신학적 성향 – 부흥(revival) 과 저항(protest) – 에 대해서 보다 더 진지하게 인식하며 또한 비평적으로 수용

Sebastian Kim (headshot)

김창환교수는 로버트 와일리 공공신학 석좌교수이자 코리안 센터의 학장입니다. 그는 영국과 인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대학과 신학교에서 폭넓은 강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Royal Asiatic Society의 펠로우, Global Network for Public Theology의 집행위원, Society for the Study of Theology의 회원입니다. 김 박사는 공공신학, 세계기독교, 아시아신학, 신학과 평화구축과 같은 주제에 대해 폭넓게 저술과 출판을 해왔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공동 저술했습니다.

Originally published

January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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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by Harrison and Inés Velásquez-McBryde, pastors of The Church We Hope For, share about how they’ve experienced the healing and renewing work of the Spirit during their church plant’s early years.